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에게

내가 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내 아이들을 사랑하리

허공을 걷는 길 2009. 5. 19. 12:00

1.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내 아이를 사랑하겠는가.

 

 

 지금 큰 아이는 28세

 그러니 지금부터 약 27년 전 으로 돌아간다.

 

 나는 서울 서초동에 있는 건설공사 중 철골공사의의 책임자로 현장에 명받아 마산의 거주지를 서울 봉천동으로 옮겼다.

 당시 나는 살림살이가 너무 어려원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하여 급여외 서울 현장 파견에 따른 파견비를 별도로 회사에서

 주기 때문에 이중 살림살이(마산,서울)를  하나로 뭉치기로 하였다.

 신혼이기도 하고 장모님께서 내 급여를 계를 들어줄테니 어렵지만 나의 현장 파견비를 생활비로 쓰고 현장일이 끝나고 나면 목돈을

 만들어 주시기로 하였기에 그렇게 하기로 하고 쓰러져 가는 듯한 집 방 한칸에 조그마한 부엌(요즘 생각하는 부엌이 아니고 방을 데우기

 위한 연탄을 넣기위한 공간 정도)이 있는 집에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오는데 서울대 입구 지하철 역입구에서 아내와 1살 짜리 아들이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

 데이트 겸 구경 삼아 3명이 함께 집 주위를 돌면서 걸어가다 보니 힘들게 일한 모든 사람들이 짝짝이 포장마차에 둘러 앉아 한잔씩 하고 있다.

 오늘 하루의 피로를 저 쓰디 쓴 소주 한잔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그 때 3~4살 짜리 사내 아이가 바지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오면서 칭얼칭얼 되면서 보챈다.

 그 때 아마도 그 아이의 어머니인 것 같다.

 그 어머니 조차 삶이 힘겨웠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욕을 퍼붓는다.

 "야이 빌어먹을 놈아 그만 보채라 나도 힘들어 죽겠다"

 그 순간 아내는 무심코 보았는지 모르지만 내 가슴에는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그 때 내 아내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우리도 살기가 힘이 들면 우리 아이에게 저렇게 욕할 수도 있겠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나의 삶이 힘들다고 내가 내 자식보고 욕을 하고 원망한다면, 자기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가 커서 사회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때 그 자식들이 부모들에게 조차 사랑받지 못하였다면

 그 어느 여자가 그아이를 사랑 해주며 사회생활할 때 그 누가 그 아이를 인정하려 하겠는가?

 부모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은 아이를 그 누가 귀하게 대하여 주겠는가 하는 생각이 아직까지 머리에 맴돌고 있다.

 그 때 이 심정을 아내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같이 공감하였다.

 

 그 어느날 부터 우리 아이를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

 항상 '우리 왕자님' 이었다.이 호칭은 큰 아이 28세인데도 아직 우리 왕자님이다.

 

 한번은 대학 2학년때인가 전화가 왔다

 엄마를 바꿔달라 한다.

 엄마가 평소때 날 부를때 쓰는말을 해보라 한다.

 왜그러냐고 하니 그냥 해달라한다.

 그래서 "우리 왕자님"하니 전화기에서 갑자기 "우아" 하고 시끌벅적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자기 친구들에게 그렇게 이야기 하니 아무도 믿지 않아 내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시절이다.

 나는 계속해서 공사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서 근무를 하여야 했다.

 그리고 아내는 교편을 잡게 되어 큰 아이가 부모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고

 나 역시 언젠가 부터 돈 벌어주는 기계로 변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내근(사내 근무)할 때는 최대한 큰 아이와 지내고 하였다.

 그런데 현장근무 시 필요할 것 같아 비디오 카메라를 구입하였다.

 그 당시는 비디오 카메라가 엉청 큰것이어서 너무 무거워 잘 활용이 안되어

 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디오에 담아두기로 했다.

 

 "철아 너는 커서 훌륭한 인물이 되었을 때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하자할 때 적응이 안되면 안되니

  오늘부터 주 1회 독후감 발표를 해라. 아빠가 이 비디오 카메라로 찍어 주겠다"

 하고 비디오 카메라 앞에서 약 1년간 가까이 그렇게 카메라를 무서워 하지 않도록 적응력을 키워 나갔다.

 

 우리 아이는 어릴 때 천식으로 인해 병원에도 많이 다녔고 마산에 있는 종합병원에서는 주사 1대가 그 당시 내 한달 봉급 수준되는     

 주사를 몇 년간 맞아야 한다 하였으나,살림살이가 어려워 그 주사 대신 운동을 시키기로 하였다.

 태권도,합기도 등 열심히 하였고 재미 있어 하였다.

 병원에서는 내가 무지한 부모로 보였는지 절대 그 운동들은 금물이라 했다.

 특히 도장에서는 먼지가 많이 나기 때문에 절대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건강하게 자랐다.

 

 고등학교 때 일이다 키가 엄청 큰데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해놓았으니 발육도 잘되었고 운동신경이 발달되어

 마산,창원등에서 길거리 농구대회가 붐을 일으킬 때 그 아이들의 팀은 경남에서는 항상 1등 하였다.

 가끔 지방 방송에서 촬영하고 인터뷰하면 다른 친구들은 카메라를 의식하는 듯하였으나,우리 아이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들였다 한다.

 

 우리 딸은 오빠와 9년차이다.

 완전 늦둥이다.또한 애칭이 공주이다

 우리 딸은 초등학교 입학은 창원에서 하였으나 나의 직장이 거제도로 이동됨에 따라 우리 가족 모두가 거제도로 이동했다

 아내 또한 창원에서 거제도로 학교를 옮겼다.

 처음에는 도시생활에서 거제도 생활하는데 적응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창원에 살때는 월급날 가족이 외식 후 가족끼리 노래방에서 노래도 부르고 창원 용지 호수도 거닐면서 가족사랑을 항상 확인하였다

 그러니 자식들과 부모간,아내와의 가족문제는 전혀 없었다.

 가끔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우리는 1시간 이상 넘겨보지 못했다.

 대부분은 내가 아내에게 먼저 사과를 한다.

 

 큰 아이가 2살 때 서울 파견 근무 할 때 일이다.

그 당시 별것 아닌 것 가지고 부부 싸움하였을 때 아내는 아이를 두고 부산에 가겠다 한다.

 나는 아내를 잡고 사과를 했다.

 아마도 내 기억으로는 서울에 는 정동도서관 앞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피한 것도 모르고 그 당시만 하여도 그 도서관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내 모습을 보았지만

 창피하기도 하였지만 내 가정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자산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는 갈 마음도 없었지만 궁핍에 찌든 나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 일부러 그리한 것이었다.

 

 지금은 우리 딸은 고3이다.

 한참 힘들 때 이지만 어렵게 힘들게 잘 버텨 나가고 있다.

 그 힘은 부모의 사랑이다

 중학교 때인가 보다.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자식과 부모간의 관심도를 갖게하기 위하여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셨다.

 예를 들면 우리 딸 담임 선생님 이름,담당과목,반,번호등을 부모가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학생들끼리 몇명이 Group으로 편성

 동영상을 찍는다.

 우리 딸은 계속 중간 중간 전화가 온다.

 예상문제외 내용이 나오면 나에게 Inform을 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지에 왔다.

 당연히 대답은 제대로 해주었다

 그러다가 내가 "우리 공주 친구들은 모두가 다 예쁘고 공주 같이 생겼네"하였더니

 그 중 리더인 학생이 그런다.

 "지원이가 왜 학교에서 그리 하는지 이유를 알겠다"한다.

 그게 무슨 이야기 인지 물어 보았다.

 친구들은 웃기만 한다.

 아마도 공주처럼 생활한 모양이다.

 친구들에게 조차.......

 

2.자식에게 물려줄 유산은 물질적 재산이 아니다.모두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물려주는 것이 진정한 재산이다. 

   호랑이는 새끼를 낳으면 언덕 아래 던져놓고 언덕위로 올라온 새끼만 키운다.

   정글에서 홀로서기를 가르켜 주는 것이다.

 

 큰 아들은 머리가 할아버지를 닮아서 좋은 편이다.

 막내 딸은 아마도 날 닮아서 무척 노력하는 노력파이다.

 

 큰 아들이 고대 체육교육학과 3학년때 년상의 여대생(같은 학교 신문방송학과)과 사귀고 있었다.

 종교도 우리와 틀린다.

 우리는 불교 이었지만 그 여대생은 성당에 다녔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는 가정형편도 우리보다 엄청 좋은 편인것 같았다.

 그 여자 아이 집에서는 우리 아이를 참으로 좋아 하는 것 같았다.

 좋은일이 있으면 항상 불러서 같이 즐기고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하교에서 운동하다가 다리를 다쳤다.

 '후방 십자 인대 파열'국내에서는 수술 조차 안된다 한다.

 ROTC까지 합격하여 얼마 안 있으면 ROTC 교육을 받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장교로서 복무하여야 하는데..........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버린 상태다. 

 

 우리 아이가 대학내에서도 농구 동아리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나 보다.

 아이를 데리고 일원동에 있는 삼성의료원에 가기로 하였는데 예약기간이 너무 긴 시간이 남았다.

 그런데 고대 출신으로 현재 농구 선수로 뛰고 있던 모선수와 잘 알고 있었든지 그 선수가 주치의 이신 A교수님과 연결이

 그나마 검사하는 시간이 단축되어 아들 사는 집에 가서 데리고 병원에 가기로 한 것이다.

 

 집을 가보니 참으로 내가 무심한 아버지라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늦겼다.

 반 지하방

 그것도 문턱이 높고 집안은 햇빛이라고는 볼 수 없고 친구와 같이 있다는데 조그마한 방 2개에 3명이 어울려 지내다.

 자식 자랑만 할 줄 알았지 어떻게 사는지 조차 몰랐던 아버지 였다.

 그래도 아들은 아빠의 가정 형편을 감안하여 그리 하였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너무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병원에 가니 그 여자 친구가 와 있었다.

그 아이이름은 SB.

 너무나 갸날퍼서 한 순간 어찌 이런 아이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생각일 뿐이었다.

 우리 아이를 위해서 무거운 가방도 몇 개씩 한꺼번에 들고 또 얼마나 상냥한지.........

 

 병원에서는 장애자 판정을 내린다.

 국내에서 수술이 불가하고 아직 젊으니 스스로 인대가 붙어지기를 바라며 그냥 관찰하자 한다.

 ROTC 입영은 물거품되었다.

 신체검사 재검 시 공익 판정을 받았다.

 

 SB에게 너무 고마워서 밥을 사주고 싶어 의사를 타진해보니 자기네들 잘 가는 식당이 있다해서

 같이 밥을 먹는데 밥 먹는 것은 고양이 눈물 만큼 먹는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그 SB이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살아온 환경을

 그 아이는 일찍부터 해외생활을 하였고 대학교만 한국에서 다닌다 한다.

 오빠는 미국에 유학생활 중이고

 그래서 그런지 SB이는 5개 외국어가 능통하다 한다.

 향후 장래 꿈은 둘이서 UN에서 근무하고 싶다한다.

 요즘 같이 글로벌 세계에서는 탐이 날 만한 며느리감이다.

 

 다시 묻기를 "둘이 사귀는 전제 조건이 무엇이냐?"고

 둘 다 결혼을 전제조건으로 사귄다 한다.

 참으로 고맙다.

 그리고 SB에게 "너가 우리 아들보다 먼저 졸업하니 너 졸업식때 우리가 올라 올테니 부모님과 상견례 하였으면 한다"

 하고 내 의사를 전달하니 그 여자 아이는 물론 우리 아이도 너무 좋아한다.

 내 개인 e-mail Adress를 주고 부모님의 의향을 전해주기로 하였다.

 결과는 서로 좋다는 내용을 받았고, SB 졸업식날 우리아이와 우리 내외간에 졸업식에 참석하고

 SB 부모님과 상견례 후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아마도 기대가 큰 모양이다.

 그리고 SB이네 가정은 형편이 넉넉한 것 같았다.

 인사동에 있는 전통 한식집으로 예약이 되어 있다 한다.

 식사 중 SB 모친께서 물어본다.

 우리 아이도 졸업 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나는 우리 아이에게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동생도 공부를 하여야 하니 유학을 간다면 onE WAY TICKET 만 끊어주고 유학가서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를 하던지

  사내아이로서 홀로서기를 하라고 가르켜 왔습니다."

 "그렇다면 돈이 없다는 이야기 인가요?" 약간 불쾌하다.

 매사를 돈으로 키우는게 만사 해결책은 아니지 않는가.

 적당한 책임감과 적당한 적응력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SB 부친께서 언제 내려 갈 거냐고 묻는다.

 회사 일 때문에 오늘 내려 가야 된다고 하였다.

 

 부모마음은 다 같겠지만 딸 가지 부모와 아들 가진 부모의 마음은 좀 다른 것 같다.

 그리고 살아온 환경의 차이에 따라 아이들 키우는 사고도 틀린 것 같다.

 그 후 년상의 여인이다 보니 결혼을 서두르려고 하였나 보다.

 결국 두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우리 아이는 다른 목표가 있어 공부를 더 하기 위해 기달려 달라 하였고 SB과 그녀의 부모는 아마도 서두르자 한 모양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SB에게 마지막 mail을 받았다.

 난 아직 두 아이가 헤어진 것에 대하여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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