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작장생활 손자병법

꼰대의 직장생활 손자병법

허공을 걷는 길 2022. 6. 16. 12:50

군 복무 시절 - 자대 복귀, 4번의 유격훈련 그리고 제대

자대에 복귀하니 모두들 날 보고 수근거린다.

수송관에게 복귀 신고를 하니 부대장(대령)부터 군수시설과장,위병장교가

전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한다.

그리고 나는 수송부로 복귀 명을 받았다.

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냐 하면 군수시설물 비리라 한다.

75년도만 해도 그 당시 좋은 시설자재들, 특히 목재들은 전부 국산이 아니라

외국에서 지원받은 물자였는데, 그 시설물자를 다 팔아서 한 사람을 살리려다 전부다 죽게 되었지. 무슨 이야기냐고요?

내가 있던 부대는 지금도 비슷하겠지만, 경상도 장교, 전라도 장교가 나름대로의 파워게임을 하고 있었다.

부대장은 전라도 사람,군수시설과장도 전라도 사람,중대장들도 전라도 사람,

인사참모만 경상도 사람이였는데, 이번에는 경상도 인사참모가 소령으로 진급하여야 하는 Case 였는데, 군수시설과장이 소령, 부대장이 Star가 되기 위해 방산비리를 벌렸던 일이 벌어졌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 사이에서 난

희생재물이 되었던 것이다.

인사참모가 CID에 군수시설물 비리에 대해 투서를 넣어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 한다.

그러니 당연히 부대 내에서는 경상도라 하면 이를 갈 정도로 싫어하는 분위기 였다.

군수시설과장이 군사재판에서 불명예 제대후 부대에 있는 친구인 중대장을 보러 왔다.

그럼 친구만 보고가지 왜 날 불러?

날 보고 하는 이야기 정말 끔찍한 이야기를 한다.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는지 내가 꼭 복수를 할 것이다. 내가 못하면, 내 아들이. 내 아들이 못하면 내 손자가 할 것이다."

정말 뻔뻔한 인간이었다.

당신 덕분으로 겪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고초를 껵었으면, 최소한 나한테 사과

정도는 해야되는게 맞는지, 아니면 내가 투서를 넣어서 당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협박,공갈을 쳤던 놈.

그 놈은 지금쯤은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더러운 양아치 같은 놈.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난 중대장의 항상 나쁜 일의 Target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툭하면 사소한 실수만 있어도 중대장은 나를 영창 보내라 하였지만,

헌병대에서 사유가 영창감이 되지 않았기에, 그 대신 유격훈련을 받으러 가야 했다. 그것은 중대장의 권한으로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벌이였기에...

나는 그냥 나 자신에게 스스로 체력단련한다는 셈치자 하고, 아무 대꾸도 없이 바로 바로 유격훈련을 받으러 갔다.

이 부대는 군수사 부대였기 때문에, 3년 동안 유격훈련을 2번 만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근데 나는 지역이 경상도라는 이유와 중대장의 절친인 전임 군수시설과장의 남긴 공갈,협박이 그에겐 친구에 대한 복수의 바이블이어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툭하면, 유격훈련을 가야만 했다.

4번째 유격훈련을 가니,전 코스는 완벽하게 통과하니, 조교 한명이 날 알아

보고, 하는 말이 날 더러 부사관 학교를 거쳐, 유격장 조교로 오는게 어떻겠냐고 물어 온다.

그래서 난 웃으며 그랬다. "고맙다. 날 알아보고 이렇게 배려 해줘서"하고

마지막 유격훈련을 마쳤다. 군생활에서의 마지막 유격훈련.

유격훈련을 갔다오면 보통 일주일은 저녁 점호에서 항상 열외를 하였다.

난 또 무슨 미운털에 박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서,유격훈련 마치고 오는

당일부터 한번도 저녁 점호에 빠지지 않았다.

누군가 이야기 했지

"거꾸로 매달아 두어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 간다"고 드디어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군 복무를 마치는 날.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 유신군대라며 내일 이 부대를 떠나는 나에게 야간 보초를 세운다. 그리고 그 날 밤은 혼자 꼬박 밤이슬을 맞으며, 보초를 서야만 했다.

아무도 교대해주지 않았다.

내 앞의 고참들은 전역명령 받으면 1개월 정도는 모든 훈련,보초근무가 제외되었는데, 난 여하튼 별나게, 어렵게 군 생활을 마치고 부대 정문을 나가면서

한 말이 있다. '내가 부평쪽으로 보고 오줌이라도 싸면 내가 개아들이라 할

정도로 징그러운 부대 였다. 그뿐인가?

부대장이 새로 왔을 때는, 그 당시 우리 부대 옆이 공수부대였다.

그 당시 육군은 매주 수요일이 교육의 날이였는데, 교육의 날은 오전만 훈련하였다.

새로운 부대장 부임후 이 자도 약간 또라이 기질이 있어, 매주 일요일 하루

종일 교육의 날로 잡고, 엄청나게 사병들을 애 먹였던 부대이기도 하다.

그 부대는 이전을 했당는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 다닐 때 부평에 있는 동아

볼트 회사에 출장을 가더라도 그 부대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

한 동안은 꿈에서도 헌병들이 날 잡으러 오는 악몽을 꾸기도하였다.

정말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포기하지마라. 끝을 봐야 한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면 그 결과는 정말 나의 인생에서 승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고등학교 졸업식 담임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이런 경우에도 적응될 줄 정말 몰랐다.

"내가 어느 곳에 있던 내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게 성공한 인생의 참된 승리자가되는 것이다."

만약 내가 군 사법기관의 고문들을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자살을 하든지 탈영을 하였다면 이런 글도 남기지 못해겠지.

내가 존재하였기에 이런 글도 쓸수 있다. : 직장생활 손자병법

나의 이런 거지같은 군 생활이 입사 면접시험과 결혼 할 때, 플러스 요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