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작장생활 손자병법

꼰대의 직장생활 손자병법

허공을 걷는 길 2022. 6. 16. 12:47

군 복무시절 - 주특기 교육 시절

논산 훈련소를 마치고 2차 주특기 교육을 대구 제 2수송교육대로 갔다.

군 열차에서 내린곳은 동대구 역.

보통은 병력이동은 밤에만 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웬걸 벌건 대낮에 동대구역에서 다 내렸다.

그런데 군인인지 정비하는 사람인지 구분안되는 인간들이 그 많은 동대구

시민들 앞에서 정신없이 굴린다.

좌로 돌아, 우로 돌아, 어디까지 선착순....

처음에는 동대구 시민, 즉 민간인 앞에서 그렇게 당한다는게 엄청 창피했다.

때는 5월이였는지 6월 이였는지 여하튼 대구하면 엄청 더운 대프리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입고 있던 군복은 땀에 흠뻑, 몸에서 나는 쉰내는 보너스 였다.

그러다 군용트럭을 타고, 교육대대로 갔다.

그곳의 교육대대장은 육군 대령이 이 부대의 총 책임자 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나라 군대가 이렇게 썩었다는 것은 대구 제2수송교육대에서 학생장 맡아서 업무를 처리하면서 알았다.

교육부대로 가니 4대 간부를 뽑아야 된다는 것이다.

훈련소로 치면 향도와 같은 학생장, 공급계 등

그런데 그곳에서도 날 학생장으로하라는 것이다. 훈련소생각이 나서 하겠다 하였다.

학생장 업무를 하면서 친구들의 충고가 무슨 의미인지 절실하게 깨달았던

동기이기도 하다.

교유부대는 교육 5주차부터 가족들의 면회가 가능하다.

5주차 접어드니 내무반장이 날 부른다. 공지사항이라며.

5주차 되면, 그 당시 야외 운전 교육을 나가게 된다.

그 다음 공지 사항이 얼떨떨한 지시였지만 나름대로의 뜻이 있겠지 하면서

받아들였다.

면회오는 사람 인당 당시 돈으로 2천원과 그 당시 제일 좋았던 SUN 담배

1보루를 거두어 내무반장에게 자진 납세를 하여야 했다.

용도를 보면 인당 천원 + 담배한보루는 교육대대장인인 대령에게, 또 천원을 학생장에게 돌려주며 야외교육장에서 조교들 사식을 사주어야 한다.

만약 면회 인원이 작아서 조교들 사식을 못 사주게되면 소위 대구 자갈 마당이라는 곳에서 2차 대전 때나 쓰던 트럭을 일자로 세워두고 조교들은 액셀을

밟아되며, 매연이 시커멓게 나오는 트럭하부에 전 교육생들이 낮은 포복을

하여야 한다. 한두번 낮은 포복을 하고나면 코밑이 매연으로 얼룩이 질 정도 였다

참, 대대장에게 주는 인당 천원의 용도는 이 나라 똥별들을 상징하는 것

이었다.

장교의 자리는 실력이 아닌 돈으로 장교 자리를 사는 것이다.

하기사 돈으로 그 자리를 사는 것도 실력이지만.

대위에서 소령으로, 대령에서 Star로 진급할려면, 그에 맞는 상납금으로 납부하기 위해서 였다

내가 그 사실을 알고 피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이런 썩고 문들어진 군대에

국가에 충성한답시고 지원병으로 왔던가 하고....

그래서 난 조교들에게 부탁하여 부모님께 사제편지를 보내었다.

보통은 부모에게 대부분 면회올 때 용돈을 갖다달라는 내용이었기에 군사

우편에서는 금지어이기 때문에 대부분 사제 편지를 보낸다.

내가 보낼 사제편지가 그런줄 알고, 조교가 아무 거리낌없이 수고비 좀 받고

보내주었다.

난 그런 군데의 썩은 행동에 참여하기 싫어 부모님보고 절대 면회 오지말라고

보내었다.

왜냐면 부대에서 교육생 부모들에게 군사우편으로 5주차부터는 면회가 가능하다고 군사우편을 다 보내었기에.

알고보면 고마운 것 같은 =데 사실은 내가 뇌물을 챙길 때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낸거였지.

부모님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보다 하고 생각을 하신 것인지 내가 문제가 생긴 그 다음날 면회를 오셨다.

내게 문제가 생긴 사건은 일요일 사역이 하기 싫어,종교 생활 한답시고

일요일 성당에머리털 나고 처음 가보았다.

성당예배를 마치고 나오니 공급계가 흘래벌떡 나를 찾으면서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대구,서울 출신 교육생이 탈영했다는 것이다. 내무반장에게 보고를 하려면

학생장인 내가 그 내용을 파악한뒤 보고하여야 했다.

내용인즉

대구 출신 교육생이 그날 자기 약혼자가 면회오기로 되어 있었는데,안 와서

고무신 꺼꾸로 신었다고 찾아가기 위해 혼자 가려니 겁이 나니, 서울 출신

교육생을 꼬득여 같이 탈영했다는 것이다.

난 보고는 점호 전에 하기로 했다. 괜히 일찍 보고했다가는 기합부터 얻어

맞을 시간을 그나마 짧게 가기 위한 수단으로 그 방법을 택했다.

어차피 이래 당하나,저래 당하나 마찬가지 이니..........

그 날 점호시간 동기 훈련병들은 기합으로 끝났지만,난 얼마나 죽도록 얻어

맞았는지, 거것도 얼굴이고 어디고 할 것 없이 멍이 든 상태였다.

서울 교육생은 마침 점호 일보 직전에 들어와 무사하게 넘어갔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 이지만 대구 교육생은 탈영병으로 잡혀 남한산성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데 그 때 부모님이 면회를 왔던 것이었다.

부모님이 얼마나 놀랐는지 그 후 11주 내내 면회를 오셨다. 닌 상납금내는

돈도 아까웠고, 음식들을 조교놈들에게 그냥 주는 것이 아까워 오지 마라

하였지만 부모는 자식이 별 탈 없는지 항상 궁금하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오지말라는 이야기도 못했지만......

그렇게 11주를 마치고 자대로 배치되었다.

자대는 군수사령부 최 전방이라 불리는던 부평창으로 배치되어 자대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