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행복한 나의 이야기(내가 어디서 왔는가? 4)

허공을 걷는 길 2008. 6. 25. 12:20

중학교 시절

학교 가면 학생

집에오면 가게 점원

당시 내 또래에 비해 덩치가 큰 덕분으로 내 덩치보다 큰 짐(당시 지물포를 운영 함에 따른 물건들)을 학교수업 마치고

외할아버지 가게(당시 부산 국제시장)에서 둥쳐 매고 버스정류소까지 옮겨주면 그때부터 서면(현재 롯데 백화점 근처)

까지 이동하여 가게까지 가는 게 내 몫.........

 

한번은 너무 무거워서 어쩔 줄 모르다가 그 짐을 발로 툭툭차면서 굴려가고 있는데 할머니 한분이 오시더니 혀를 끌끌차면서

내가 너무나 안스러운지 거들어 주어 가게까지 옮기고 나니 그 할머니께서 아버지께 야단을 치신것 같다.

그 후로는 간단한 것만 심부름을 하였다.  

그때 느낀 것이 가난한것을 물러주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하나

 그러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보다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하나 뿐 그러나 공부의 운을 나를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정말 최선을 다하였다.

나 스스로 나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비록 내가 원하는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그리고 후회도 없다.

그러한 길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학교 담임선생님들에게 배웠다.

당시는 삼류학교라 하였지만 나에게는 정말 인생을 알게 해주신 모든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산 건국중학교

부산 영주동 산위에 있는 학교였지만 지금의 건강한 몸을 지닐수 있었던 것도 등하교 길에서 자연히 운동을 할 수 밖에 없었든 나의 모교 부산 건국중하교.........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사립학교로서 주,야간을 운영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공부에는 크게 집중을 하지 않았던 때라 학교에서는 도서관 운영은 꿈도 꾸지 못했다.내 경우는 이미 국민학교 5,6학년 시절을 상기하며 사범대에 가야겠다는 목표가 서 있어 공부를 하여야 하지만 집에 가면 가게 점원노릇을 하여야 하니 한번은 수업이 끝난 후 몰래 학교 건물 교실 바깥에 잇는 난간 끝에 난간등 밑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났을 때 갑자기 교실 안쪽 창에서 뒤로 확 잡아당긴다.

얼마나 놀랬는지 기절 일보직전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당직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이 지금 무엇을 하느냐고 다구치시길레 자초지정을 말씀드렸다. 그 날은 당직 선생님께서는 외부 순찰을 하다가 너무 위험하게 보여 불면 건물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 뒤에서 끌어 당겼다 하시면서 다음날 학교에 건의하여 교실 하나를 도서관처럼 운영하게 해주신다고 두번 다시 이렇게 위험한 행동은 하지말라 하시며

돌아가라 하신다.

그 후 며칠이 지남 후 교실을 도서관 처럼 활용하여 좋다는 말씀이 있었고 후배와 더불어 마음 놓고 밤 늦게 까지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 해주셨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정말 선생님이셨다.

지금처럼 인성에는 괸심없고 무조건 일류대학 가야하고 공부 1등 못하는 아이들을 벌레보듯 하는 선생님들에 비하여 보면 그 당시 선생님은 인격을

형성해 주시는 진정한 선생님이셨고 정말 존경받아야 하실 분들이다. 

 

당시 어린 생각에도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부산 영주동에서 서면까지 바쁘지 않으면 걷고 아버지께서 주신 차비로 저금을 하였고.......

보통예금,정기예금,적금.................

 

나는 운동을 엄청 싫어한다.

덩치는 커지만..........

중2때 부산 시내 중학교내 체육대회가 있다고 무조건 덩치 조으면 차출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난 눈이 나빠 안경 돗수가 높고 안경알이 엄청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을 벗으면 10M 내 모든 사물이 구별이 안된다.

이런 나를 키커다는 명분 하나로 농구선수로 그것도 센터포드로..........

내가 생각해도 내모습이 정말 우스웠다.

땀이 너무 흘러 안경을 벗었더니 구분이 안되니 반대편에 패스를 하지 않나...

그래서 우리학교는 나의 덕택으로 1차 게임에서 하프게임으로 끝나고 말았다.

너무 너무 창피하고 내 모습이 우스웠다.

이젠 내 사전에는 운동은 없다하고 다짐 후 철저하게 운동하고는 담쌓았던 시절이었다.

그 후 내 평생 운동을 즐기지 못했다.하는 것도 보는 것조차 싫어했다. 나의 이런 과거를 모르는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이런점에 대해서...

  

그러다가 우연히 사진에 대해 취미를 갖게되었다

그 당시는 중고 카메라도 많았다.  

사진을 찍으면 당시 필름 한통에 24매짜리였는데 현상을 해보면 어떨때는 몇장도 안 나올때가 있었다.

사지찍고 사진으로 나올 때까지 당시만 하더라도 약 1주일 정도 걸렸다.

그 당시 기다림이라는 것을 배웠고

스릴을 배웠다.

요즘 세대에게는 이해가 전혀 안될 일들이니까......................

 

 

고등학교 시절

이 시절에는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 인생에 대하여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준 시절이었다.

내가 다른 아이들 보다 키가 커고 덩치가 큰 탓으로 당시 나를 유혹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러나 내 목표를 향해 계속 가야하였기에 그 친구들과 친구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요즘 말로 범생이에 속하였다.

그러니 친구들과 자주 싸우게 되고 안경조차 잘 깨어먹으니 아버지 한테는 계속 혼나고.........

이 시절 또한 집에 가면 점원 학교가면 학생 신분이었다.

그러나 이 고등학교는 나름대로 공부하려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던 탓으로 학교 도서관이 운영되어 중학교 시절의 헤프닝은 없었다.

3학년 때인가 보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화장실 냄새가 내 주위에서 난다.

나는 내 짝에게 방귀 뀌었느냐고 물어보니 교복 등뒤를 보라는 것이다.그것도 수업시간 중에..

옷을 벗어보니 똥이 묻어있다. 머리에 뚜껑이 확 열린다. 내 짝이 한친구가 그렇게 했다하여 수업도주에 책상에서 획 일어나 순식간에 싸움자이 되어버렸다.

수업 마치기 전에 교무실에 둘다 불려가서 둘다 실컷 얻아맞고 벌도 서고..............

집에 돌아 갈 때 그 친구가 이런다.

"너는 지금 책을 놓고 사회에 나가면 굶어 죽지만 나는 머고 살 수 있다.책속에 인생이 다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니 사회도 좀 알아라"하길레 나는 나의 점원생활,

학생생활 병행하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너나 잘하라하고 비웃고 헤어졌다.

졸업식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게 다 끝이나도 그것을 못들을 정도 였으니까...

박찬성선생님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

오늘의 내가 있게 해주신 진정한 교육자이시자 영원한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저에게 해주신 말씀

"진아 지금 내거 어디 있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후회없이 사는게 인생의 승리자이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이 말씀 저의 자식에게까지 물러주고 있습니다.

영원한 패배자는 절대 없고 각자 각자의 위치에서 할 일들이 다 있다고......

그 덕분에 저의 아들 딸은 아빠보다 더 나은 자식들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 후 대입 예비고사에서 나는 떨어졌고 2년제 전문대학에 들어갔다.

이때가 제일 힘든 시절 이었고 아마도 홧병 일보직전이었는가 보다. 그 모습이 답답한 할머니는 손자에게 담배를 가르켜 주셨다.

"모든 근심 걱정을 이 담배연기처럼 후욱 날려 보내라고........."

그래서 내가 살아가면서 이 담배를 끊으려고 수차례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왜냐면 우리의 인생 길은 순풍에 돛단듯이 절대 가는 법이 없고 여러사람의 조직속에서 움직여야 하기에 항상 스트레스라는 것을 받게 되어 있다.

 

그 전에 아버지께 제발 한번만 재수하게 해달라 하였지만 우리 가정 형편상 안되는 일이었지만 나의 목표를 향해 가야하였기에 매달렸지만 아버지는 완강하시다.

집안 형편도 그러했지만 학창시절 재수하면 인생도 재수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절대 안되다는 것이다.

그 당시 부산시청에 아버지가 아시는 분이 계셨다. 아마도 바로 자리만 있으면 취직 시키려 하셨나 보다.

아마도 그 분이 전문대학 토목과를 이수하고 나오면 취직시켜주겠다 한 모양이다.

그래서 전문대학 원서 쓸때도 꼭 토목과로 하라 하신다.

아무리 생각해도 토목과는 나의 이상인 보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그래서 아버지 몰래 1차지망 건축 2차지망 토목 3차지망 건축 4차지망 토목으로 원서 제출하였다.

학교 면접관이 날 더러 "장난치냐 이게 무엇이냐"라고 하시길레 나는 건축과가 안되면 이 학교 안오겠다고 했더니 기가 찬지 그냥 웃으시며 알았다 하였거 건축과로

합격하였다.처음으로 내가 원한 것이 이루어졌기에 정말 신났다.그러나 아버지는 나와 반대였다. 그런 학교도 1차지망에서 안되고 2차지망 밖에 안되냐고 정말

입에 담기 싫은 말조차 서슴치 않으신다. 

 

전문대학 1학년 때 고등학교 3학년 친구들이 반창회하자고 연락이 왔다.

좀 창피하지만 나갔다.

그런데 고3때 나의 교복 등뒤에 똥을 묻힌 친구가 그런다.

"야 너 그렇게 공부하더니 어느 대학교에 갔냐"

"동의공전에 갔다 왜"

'"너는 그렇게 공부한다고 폼 잡더니 4년제도 아니고 2년제 밖에 못 갔냐,나는 재건학교 선생님이다.내가 그 때 한 이야기 기억나냐?"

순간 아버지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벌건 내낮에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지만 엉망진창이 되어 집에 들어가니 아버지께서 부르신다.

대꾸하고 싶지 않다.아니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종생이 아버지가 부르신다고 2번 왔다 가더니 좀 있으니 아버지가 오셔서 아바지가 부르는데도 안온다고 정말 별이 보이도록 얻어 맞았다.

순간 내 입에서 "아버지 왜 날 낳으셨으요,자식이 한번 해보고 싶다는 재수도 한번 못하고 그런 능력도 없으면서 왜 낳으셨어요"

아버지는 눈이 둥그레지시다가 그냥 돌아서신다.

그 후 정말 아버지와 마주 앉아서 밥을 먹어본 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였다. 

이 일로 아버지와 나는 내 나이 55세가 되어도 서로의 가슴에 상처로 남아있다.

그래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비수보다 더 무섭다 하는 것을 깨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