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행복한 나의 이야기(내가 어디서 왔는가? 1)

허공을 걷는 길 2008. 5. 25. 10:56

나의 기억은 요즘은 초등학교라 하지만 그 당시는 국만학교였다.

지금은 폐교되고 없지만 참으로 많은 기억과 나의 인생이 바뀔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지금의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지금 최상의 아내와 더불어 30년 가까이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힘든일이 큰 파도처럼 밀려와서 어쩔 쭐을 모를때 도와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 바로

우리 가족이었습니다.

아버지,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머니와 장모님,그리고 장인어른,아내,자랑스런 아이들

중학교, 특히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박 찬성선생님),부산 동업전문대학(지금은 동의 과학대학)건축과

학과장(전 세진학과장님),한마음 선원 혜연스님 등 수많은 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내었다고 생각하니

이 세상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고마우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 당시는 밉고 너무나 미워 죽이고 쉽도록 미워도 해보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항상 이 목숨조차

아깝지 않은 분들도 계셨고..........................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부산 중앙동에 있는 동광초등학교(지금은 폐교되었슴) 5,6학년 때 담임 선생님(정 동근선생님)은

아마 죽기 전 까지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처가살이가 무엇인지도 알았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겠다는 나름대로의 인생 목표를 설정하였고................

 

우리 부친은 어렸을 때 아주 부자로 살으셨다 한다.

그런데 백부님은 그 재산 관리를 잘못해서 몽땅 탕진하셨다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태평양을 두루 누비는 마도로스가 꿈이어서 부산 해양대학교에 다니셨다.

 

6.25 전쟁으로 인해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훈련받은 후 당시 소대장 목숨이 하루살이 소대장이라 하여

소대장이 많이 부족하여 육군보병학교(?)에서 한달 간 교육받으시고 소대장으로 전투에 참여하셨고,

 그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하시어 등에 파편으로 후송되신 후 그 전투에 참여하신 모든 분이

돌아가셨다 합니다.

그 후에는 제주도에서 훈련소 교관 생활을 하시다가 휴전 후 전역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만해도 아버지의 꿈속에서 조차 그 전쟁의 악몽을 못 잊으시고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르신다.

"진격","돌격 앞으로",""위생병"

심할 경우는 안방에 있던 요강까지 둘러차서 자다가 오줌벼락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너무 놀래서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으면 어머니가 아버지를 또 깨우신다.

잠꼬대 그만 하시라고............

 

정말 어려운 것 모르시고 자라시다가 6.25 전쟁으로 모든 꿈을 잃어버리고 긴 삶의 여정을 걸어가기 위해

어머니와 결혼하셨고 제대 후 그 당시 모두가 그러하셨겠지만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내가 졸업한 중학교에

선생님으로 계시다가 그만 두시고 외할아버지(당시 부산 국제시장에서 지물포를 운영)밑에서 장사를 도우셨다.

 

나는 그 당시 처가살이가 무엇인지 몰랐고,학교에서 시험쳐서 100점 맞으면 외할아버지가 잘 했다고 용돈을 주셔서

그 재미로 자주 아버지가 일하시는 외할아버지 점포로 자주 갔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게 부담스러웠는지 자주 오지말라고  야단치시기도 하였고............

 

배다른 나와 동갑내기 이모,어린 외삼촌들은 툭하면 "너네는 거지야 우리 아버지가 사준 집에서 살고 

우리 아버지가 주는 돈으로 밥도 먹는거야"라는 소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듣기 싫어 이모고 외삼촌이고 할 것 없이

내 입에서는 거침없이 욕이 나온다."야이 가시나야 우리 아버지가 일헤서 벌이는 것이다.'라고......

지금 냐 나이 오십 중순에 들었지만 아직 그 이모를 아직 이모라고 부르지 않는다.

정말 어쩌다가 만나도 이름을 부르거나 가급적 만나기를 서로 꺼린다. 

아버지는 얼마나 생활고에 져들어셨는지 3~4학년 때 부터 칠판에 쓰는 글이 잘 안보인다고 아버지께 몇 번을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안경을 폼으로 끼고 싶어한다고 야단만 치고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뒤 하교에서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연락하셨는지 하루는 안경점에 가자하신다.

시력검사를 하니 -0.09 안경점에서 하는 말 왜 인제 데리고 왔느냐 조금만 더 있었으면 실명할 뻔했다는 소리에 아버지는 그래도 믿기지 않으셨든지

별로 기분이 좋지않았던 것 같다.

이때 부터 아버지와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기 시작하였을지도 모른다.  

 

당시는 중학교가는 것도 전부 시험을 쳐서 가야했기에 일류학교,삼류학교(당시 용어로는 똥통학교로 칭 하였슴)로

분류가되어 있어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선생님들은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일류중학교에 한명이라도 더 보내기 위해

보충수업을 했는데 보충수업비 내는 사람만 수업을 받을 수가 있었다.

보충수업비 못내는 아이들은 모두가 가정이 어려운 아이들끼리 먼저 집에 간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치 못하고 어떤 경우에는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었다.

국민학교 5,6학년 담임선생님의 이름을 악몽처럼 떠올리고 현재 내가 있을 수 있었엇든 것은 시험치고 점수가 나쁘면

"공부도 못하는게 보충수업도 안받고,다른 학교에 전학가라"이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학생회 회장이 우리 반이었지만 우리 담임선생님은 그 친구가 공부도 잘해서 좋았겠지만 그 어머니 역시 우리들에게

참 잘해 주셨다.

어린이날,체육대회,소풍 가는날은 우리가 먹어보지도 못한 희귀한 과자들도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담임 선생님에게는 얼마나 잘 하셨을까

그러니 우리는 미운 오리새끼 일수 밖에.....................

 

그래서 그 당시 나는 다짐했다.

"나는 커서 선생님이 될 것이다.최소한 저런 선생(정동근 선생님)이 아닌 훌륭한 선생이 되어야 겠다.

 내가 거름이 되어 나보다 더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시켜 정말 훌륭한 선생이되는 것이 나의 보람으로 알고 살아가야겠다"

라고 다짐을 했다.

 

"물질적 욕심은 끝도 없지만 보람으로 산다면 항상 삶이 풍부하다"라는 사실을 국민학교 6학년에 터득하고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