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에게

원래부터 문제아이는 없다.

허공을 걷는 길 2009. 5. 23. 17:36

6.원래부터 문제아이는 없다.환경이 인격체를 만든다.

 

 

  나는 국민학교 5,6학년때는 사고만 치는 문제아 였다.

  나도 처음부터는 문제아가 아니었다.

  어린시절 처가살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에게는 배다른 이모,외삼촌들이 있었다.

  요즘말로 이모나 외삼촌이지만 나하고 나이가 같거나 작았다.

  당연히 철부지들이니까 그러하였겠지만 항상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아버지(나한테는 외할아버지)가 너네 먹여 살린다,

  집을 사줬다 등등의 어린 나이인 나에게 자존심 상하고 어떨때는 챙피할 정도의 수모감을 느껴다.

  지금 내 나이 50중순을 지나고 있지만 그 배 다른 이모와 외삼촌들과는 아예 연락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국민학교 때 그 마음의 상처로 인해.............

 

  우리때는 중학교 고등학교는 시험을 쳐서 1류 학교 부터 3류 학교에 실력대로 가는 제도 였다.

  그러기 때문에 5,6학년 때 부터는 보충수업을 하여야 한다.

  당연히 보충수업비를 내어야 하는데 우리 아버지의 형편으로는 불가능 하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 다른 동네로 이사까지 하였다.

  성적도 나쁘면서 보충수업을 받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지 않으니 5,6학년담임선생님의 눈에는 정말 눈의 가시였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트럭이 많이 없었을 때라 소마차가 트럭 대행할 때 였다.

  그 소마차에 쓰는 굵은 고무끈으로 그 당시 담임 선생님은 나를 정말 개 패듯이 그 고무끈을 휘둘러 되었다.

  요즘 같으면 그런 선생은 아무리 실력이 있고 잘났다 하여도 이 사회에서 매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반에서는 요즘 이야기하는 문제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덕분으로 나는 어린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을 설계하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훌륭한 선생님이 될거야.

   저런 망나니 같은 선생을 절대되지 않을거야.

   나는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서 내 제자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인물이 되게 하기 위하여 아이들의 밑거름이 될거야."

 

  정말 이를 악물고 국민학교 졸업하는 날은 정말 행복하였다.

  악몽같은 2년이라는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중학교,고등학교는 3류 중학교,2류 고등학교,전문대학을 나올 수가 있었다.

  아직도 중,고등학교 시절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 지금의 내가 있도록 인생설계를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3류학교 다니면서 인생을 많이 깨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위치에 있는 아이들을 보고 평가하거나 속단하지 말고 항상 꿈과 희망을 주어야 한다.

  특히 부모입장에서 가망이 없다는 판단은 절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다가 그 아이가 정말 잘되었을 때 그 부모는 어떤 마음으로 나머지 인생을 살아 갈 것인가?

  그 자식에게 속죄하면서 남은 인생을 소비할 것인지 꿈과 희망을 주어 나중에 서로가 감사한 마음을 품고서 나머지 인생을 정리하는 것이 아마도

  행복할 것이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속단하지 말라 

  힘들 수록 꿈과 희망을 심어주어라..............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버지께서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 하시는 말씀이 우리 장남이 국민학교도 졸업하였으니 아버지가 독립하여야 겠다

  하셨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정말 좋아하였다.

  학교에 가면 학생,집에 오면 가게 점원...............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학교 도서관이 없었다.

  집에가면 점원노릇을 하여야 하니 마음놓고 공부를 할 수가 없어 학교에 남아서 교실 바깥 난간에 등을 켜놓은 곳에서

  책을 보고 있으니 누군가 교실에서 나를 확 잡아당긴다.

  얼마나 놀랐는지 까닭 잘못하면 그 높은 건물 아래로 떨어질 뻔 하였다.

  잡아 당기신분은 그 날 당직하시던 선생님이었다.

  순찰을 돌다보니 아주 위험하게 보여 부르면 놀라서 떨어질 것 같아 몰래 교실로 와서 떨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끌어 앉았다는 것이다.

  왜 그리하였냐고 물어 보신다.

  사정을 이야기하였더니 몇일만 기다려 주면 교장선생님에게 이야기 해서 교실 하나를 비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하셨고

  그 후에 빈 교실에서 정말 시간나는대로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갔다.

  그렇지만 고등학교도 내가 원하는 학교는 못들어갔지만 그 학교에서 정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토록 원하든 사범대학에 가지 못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하신 분이다.

  그 당시세계사를 가르켰고 키는 나와 정반대로 작으셨다.

  그러나 아주 당찬 분이셨다.

  박 찬성선생님

  졸업식날 얼마나 울었는지 끝난지도 모르고 있을 때 이러신다.

  "진아 항상 어디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있는 그 장소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항상 지금 머물고 있는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해라"

  그 후 나는 정말 어느곳에서 무엇을 하던 최선을 다하였다.

 

  심지어 내가 회사에 입사햐여 한 동안은 최선을 다하는 의미를 찾기위해 시간을 소비하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하는 일이 비록 톱니바퀴가 물고가는 일부분이라 할 지라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보람을 찾았고 행복을 찾았다.

 

  내가 결혼할 때 내 아내될 사람은 나에게는 너무나 벅찬 신부였다.

  당연히 아내는 나와 결혼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내가 처음 아내될 사람집에 억지로 집에 찾아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나의 학벌을 묻는다.

  하나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어떻게 그런 학교를 졸업하였으면서 그리 당당한지 모르겠다하면서

  거꾸로 내가 처가 어른들을 Test 한다고 여겼다 한다.

 

  내일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대한민국 아니 세계 글로벌 기업인 회사에 부서장이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문제아가 이토록 남이 부러워하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는가?

 

  모든 것은 부산 건국중학교.부산 금성고등학교,부산 동의과학대학(당시 동의공업전문대학)다니면서

  그 자리를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스스로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하여 살아온 인생이었기에

  나를 무시하였던 주위 사람들도 다시 보아주니 나의 인생은 참으로 잘 살아온 것 같다.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번 문제아라고 하여 영원한 문제아는 없다.

  주위에서 얼마나 말 한마디 따뜻한 눈길이 우리 모든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

  이 사회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많아 질 수록 이 사회는 더욱 아름다워진다.

  모든 아이들을 내가 내 자식을 사랑하듯 사랑해줘라 아이들은 내일의 나이자 나의 미래이다.

  이 사회가 감사함으로 충만하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는가?

  모든 아이들을 내 아이 사랑하듯 사랑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경쟁은 적당하게 경쟁이 되고

  1등부터 100등까지 모두가 그 자리에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만족해 하면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좋겠다.

  모두가 1등은 될 수 없다.

  단지 내가 어느 자리에 잇던 그 자리에 있음을 감사해 하고 행복해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