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우침의 길

궁극의 자유를 향하여

허공을 걷는 길 2008. 9. 2. 06:59

궁극의 자유를 향하여

 

 

 

 

꼬리표를 감추고 보이지 않는, 

지상에 표현된 ‘나의 이데아’ 의미를 찾고자, 

 수수께끼에 대한 설명을 찾고자, 

아직은 책을 뒤적이고 싶은 욕망을 떨칠  없는 그대에게 말하노니, 

 

물론 그렇게, 

내가 보내  충동에 따라 바깥으로 구하는 것도 좋다. 

‘나의 이데아’ 표현하고 있는 것들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누군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구하는 것도 괜찮다. 

왜냐하면 그대가 상상하는 방식으로는 아닐지라도, 

나는 그러한 탐구가 그대에게 유익함이 되도록  터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가르침이나 철학, 종교, 혹은 다른 민족의 철학이나 종교 안에서, 

내가 그대에게 표현하고자 원하는 ‘진리’ 구하는 것조차도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런 탐구가 해롭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알리라. 

 

다른 삶들의 생각과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

아무리 진실 되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그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왜냐하면,

나는 오직 그대만의 것이  가르침과 사상을, 

그대를 위하여 비축해 왔기 때문이다. 

그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그대에게 그것을 은밀히 전해주리라. 

 

 

다양한 종교와 철학과 종파 사이를 헤매며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 지금은 흥미롭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울 때가

불가피하게 닥쳐오리라. 

종교를 세상에 퍼뜨린 자들이나 철학의 교사들이

마치 자기들만의 소유물인양하고

 너무도 권위적으로 묘사해 놓은 바람에

영적인 성장이나 능력 갖는 것이 그대에게는 아무래도 가까워지지 않는

까마득한 일처럼만 여겨질 수도 있으리라. 

그때에야

나는 그대를 깨우쳐  것이다. 

 모든 책들이

가르침과 종교들이

본래는 나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임을. 

그런가 하면

그들의 몫인 것처럼 보이는

만인의 가슴을 여는  일을 나는 지금껏  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에야 그대는

바깥에서 진정성 찾는 일을 그만두게 되리니, 

내면의  의해서

오직 ‘나’ 의해서만, 이끌림을 받고 가르침을 받은 

‘내 생명의 책’에서만 그대의 탐구를 집중시키게  것이다. 

그대가 진심 열성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대는 알게 되리라. 

내가 그대를  종교의 ‘대 사제’로서 선택했다는 것을. 

 종교가 비추는 영광의 빛은

그대가 이미 이해한 것들을 그리워해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존재 하게 되리라. 

아득한  별들의 반짝임 속에도

태양의 빛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는 또한 깨닫게 되리라. 

 

고대의 종교들이란  과거의 ‘내’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다른 종족의 종교는 다른 종족의 ‘내’백성들을 위한 것이며 

그대를 위한 것은 아니란 것을. 

그들 종교 안에 있는 숱한 경이로운 것들을 그대들에게 가르쳐 보여 준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 가르침 안에서

‘나’ 대한 단서를 더욱더 찾도록 그대를 고무시킬 뿐이라는 것을. 

 

그대에게 말하노니

 모든 가르침들이란

그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과거의 것들일 뿐이다. 

이를 알아차릴  있다면

드디어 때가  것이다. 

하고 많은 지식들을 옆으로 치워 버릴 때가  것이다. 

모든 가르침, 모든 종교,  권위적인 들을 

‘내’ 계시 되어 있다는 다른 ‘외부적인’책들이나 

심지어는 여기에 적힌 ‘나’ 권위마저도  치워 버릴 때가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대에게

그대의 ‘내면’에서 ‘나의 현존’ 의식할 것을 

촉구해 왔기 때문이다. 

‘외부’  근원을 대며 권위를 내세우는 모든 가르침과 종교는

그것이 아무리 고상하고 신성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대에게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없기 때문이다. 

그대 안에 있는 ‘나’에게로, 

모든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자인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게 하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쓰여  때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러니 이미 지나가 버린 종교나 인간적인 지식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도움과 안내를 찾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나’만이   있는 것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지나간 모든 것은 잊어버리라. 

과거의 것은 이미 죽은 것이다. 

그런 죽은 것들로 그대 영혼을  지울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대

과거의 것들에 머무르는  그만큼, 

그대는 아직도 과거에 살고 있는 이다. 

과거의 것들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언제나 ‘지금’,영원한 현재 안에서 산다. 

 

그대가 과거의 행위나 경험

과거의 종교나 가르침에 얽매이는  그만큼

그대는 ‘나’ 가리는 구름을

그대 영혼의  앞에 만들어 놓고 있는 셈이다. 

그런 구름들은 그대로 하여금 ‘나’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그대가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 내면으로 발을 들여 놓을 때까지는

그래서 나의‘초자아적 의식’ ‘빛’ 안으로

걸음을 들여 놓기까지는. 

 

나의 ‘초자아적 의식’ 

어떠한 경계도 없으며

만물의 무한한 ‘실재’ 꿰뚫는다.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  것이 없다. 

최종적인 완성을 목표로 미래를  염두에 두는 사람은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이고

결코 자유롭게 되지 못할 것이다. 

자기 행위의 결과를 먹고, 자기 마음을 살찌우는 일을 그만둘 때까지는 

그래서 자신의 유일한 ‘안내자’ ‘나’ 알아보고 

모든 책임을 ‘나’에게 떠넘길  있게 되기까지는. 

 

그대는

나와 하나인 그대는

‘지금’ 완전하다

언제나 완전했다. 

청춘도 늙음도 알지 못하고, 

탄생도 죽음도 알지 못한다. 

완전한 존재인 그대는

과거에 그대가 무엇이었든

미래에 무엇이 되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대가 보살펴야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지금’뿐이다.

 

걱정해야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당장 그대 앞에 있는 문제일 뿐이다. 

‘나의 이데아’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완전하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그대를 데려다 놓은

 자리에서 말이다. 

 

 

이미 되어 버린 일인데, 

어찌하여  모두를 뒤에 두고 떠나지 않는가? 

어찌하여 과거를 질질 끌고 가는가? 

어찌하여 그대 몸과 영혼에 짐을 지우는가? 

살점이 이미 뽑혀버린  조개껍질에 불과한 것들을  붙들어 안고 있는가? 

 

 모든 것이

윤회에 대한 믿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믿음에 너무 얽매여 있다. 

 

‘완전한 존재’, ‘영원한 존재’ 그대가

전생이나 내생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완전한 존재’ 자기완성이라는 것을 덧붙이는 것이 가능할까? 

‘영원한 존재’ 영원함속에서 나오는 일이 가능할까? 

영원함속으로 돌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나’ ‘있음’ 자체이고

‘그대’ ‘있음’  자체이다. ‘나’와 더불어 하나인 ‘그대’

항상 있어왔고

언제나 있을 것이다. 

‘나의 이데아’ 표현한다는 오직  가지 목적을 위하여

‘그대의  자아’ ‘만물’  안에서 살고

‘만물’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 

 

인간은 ‘나’ 몸이다. 

 안에서 나는 살고, 움직이고, ‘나의 현존’ 갖는다. 

‘나의 속성들’ 통하여, ‘나의 이데아’ ‘영광스러운 빛’ 표현하면서 

인간의 지성이라는 불투명한 면들과 그것이 만들어낸 수많은 구름들 때문에

 ‘천상의 광휘’ 인간의 시야에 닿으면 희미해지고 비틀거리게 된다. 

 

그대(‘나’와 ‘하나’인)와 ‘나’는, 인간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 

참나무가  나뭇잎들과 도토리들 안에서 다시 태어나듯이 

계절이 가고 계절이 옴에 따라

그들 수천의 도토리들과 참나무들에서 수천그루의 참나무들이 다시 태어나고,

 도토리들과 참나무들은 ....... 그렇게 다시 태어나듯이

그렇게 세대가 가고 ,세대가 온다.

 

그대는

자기 전생들을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런가? 정말 그렇게 확신하는가?

좋다, 확신한다고 해도 문제   무언가?

내가 '지금'그대에게 표현하고 있는

'나의  뜻'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대에게 '나' 과거의 '표현물'  하나를

 '실재'를, 잠깐이나마   있도록 허용했다는 단지  이유 하나만으로

그대가 '나'로부터 동떨어져 있었다는 보증은 되지 못한다.

그대가 그러한 표현을 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나의 통로'구실을 했다는 보증 말이다.

 

'나' 모든 길을 통하여 표현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대' '나' 하나이지 않은가?

'우리' 표현된 모든  들의 '생명'이요 '지성' 아닌가?

 성향이 어떠하든

수명이 어떠하든, 종족이 어떠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대가 과거에

실제로 그런 표현물이었다는 믿음이 그대를 즐겁게 한다면

그것도 좋다.

그러한 믿음이 그대에게 유익함이   있도록  주리라.

다음에  위대한 '깨달음' 그대를 열어놓는  정도만큼.

 

                                

잠시 돌이켜 보라.

그대는 너무 매여 있다.

그대의 이기적인 욕망과 이기적인 구함으로

그대의 개성은 아직도 손과 발을 과거에 묶어  채로 있다.

모든 행위의 결과를 청산함으로써

구출되고 해방되어야겠다는 관점에서만

미래를 바라본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거짓된 믿음으로 그대의 마음과 지성을 물들이고

그러한 믿음만이 그대를 최종적으로 구해줄 것이라고

그것만이 '나' 결합할  있는 유일한 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대' 원하는 어느 순간에도

그대 자신을 자유롭게   있다는 깨달음에는 문을 닫아걸고 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그대의 개성일 뿐이다.

 안에서,  지상의 삶속에서

 머무르고자 고투하는 것은 그대의 개성일 뿐이다.

내가  몸을  이상 사용하지 않게  

다른 몸으로 돌아오기를 애써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그대의 개성일 뿐이다.

 

그대는  개성이라는 것에 스스로를 묶어놓고 있다.

삶과 삶을 끝없이 접붙여 놓고는

그런 견해로 유익함을 얻고자 추구하고

그러한 미혹된 생각으로 그대의 마음을 분주하게 한다.

그대의 ‘신성한 불멸성’

‘전능한 지성’   때만이

그래서 개성이 빚어내는 모든 믿음과 견해를

기꺼이 던져버릴  있을 만이

그대는 이런 그릇된 관계의 사슬에서 자유롭게 풀려날  있으리라.

그대는 진정

‘마스터’이고,’왕’이고,,‘나’와 ‘하나’이다.

‘참 자아’ ‘왕좌’ 바로 그대의 자리이다.

그대의 개성에게는

왕이 백성이요, 하인이라는 원래의 자리를 돌려주라.

그래서 ‘내’ 시키는 자잘한 일들을 기꺼이 떠맡아 하도록 하라.

그럼으로써

‘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쓸모 있고 가치 있는 도구가 되도록 하라.

 

[조셉 베너 / ‘내안의 나’ The lmpersonal Life]

 

 

출처 : http://home.hanmaum.org/hansi/zen/board.asp?bbsid=629&bbsitmid=23645&team=319